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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제목 사우디 미디안땅 현장답사를 다녀오며..<1편>
작성자 서병선 작성일 2022-10-16 18:14:11








 

 

코로나 사태로 3년간 묶였던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에 계획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투어를 다녀왔다. 떨기나무(2007년)의 저자인 김승학 장로의 인도로 1주일간 예정된 시내산 및

 

사우디의 북서부 타북 지역에 있는 구약시대의 여러 도시들을 함께 볼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금번 여행은

 

사우디 왕가의 차기 왕세자로 책봉된 빈살만(Mohammed bin Salman)의 개방정책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유대인을

 

포함한 전세계 50개국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시내산이

 

있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나 1984년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론 와이어트(Ron E. Wyatt)가 사우디의

 

미디안 지역을 탐사하고 시내산이 이 지역에 있다는 것을 서방 세계에 알리면서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김승학 장로가 사우디 왕가의 한방주치의로 16년간 일하면서 시내산에 관심을 갖고 12차례나 이곳을 방문하여

 

론와이어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발굴하여 떨기나무(1,2권)에 소개하면서 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내산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이슈는 중요하지만 이 이슈는 오래된 난제로서 출애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기존의 시내산이 시나이 반도에 있다는 카톨릭 교회의 전통이 지난 1,500년에 걸쳐서 정설로 자리잡고 있기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을 주장하는데는 여러 난관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금단의 땅이었던 이곳을 사우디 정부가 전면적인 개방정책에 의하여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규제를 풀었다는 점에서 이곳이 과연 모세가 자기 백성을 40년간 이끌었던 땅인가에 대한 논쟁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신학적, 성서지리학적 논쟁을 하기보다는 한 여행객으로서 금번 1차 사우디아라비아

 

현장답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소개하고 앞으로 이곳이 전문가의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더 상세히 밝혀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는다.

 

 

홀리랜드투어가 수년간 준비하고 계획해 온 김승학 장로와 함께 떠나는 사우디아라비아 현장답사는 총 8일로

 

2일간은 사우디까지 오가는 비행기 여행이 위주가 되고, 현지에서는 6일간 진행되었다. 2022년 9월 29일 저녁

 

비행기로 인천을 출발하여 약 11시간을 비행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사우디의

 

북서부 타북으로 가는 국내선을 갈아 타고 모세가 장인을 만나서 40년간 거주한 미디안(Midian) 땅인 알바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의 신분에서 쫓겨나 피난처로 삼은 이 땅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4째 아들 미디안이 살았던 미디안 지방이다. 이곳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살았던 집터(동굴에 거주, Cave man)와

 

모세의 우물 등이 고고학적 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부근에는 모세가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서 정착한 엘림(아윤무사)으로 알려진 장소에 12개의 샘과 70여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대로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사막지역에도 비가 전혀 안 오는 것은 아니고 우기에는 상당한

 

양의 집중호우가 오기도 하므로 곳곳에 저지대에 물이 모이는 장소가 있고 이를 오아시스라고 부른다. 이 엘림도

 

아직도 땅속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였다.

 

 

다음날인 10월 1일에는 사막을 달릴 수 있는 전용 지프(JEEP)를 타고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아말렉과

 

전투를 치루어 승리했다는 르비딤 계곡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출입이 어려운 험한

 

장소였다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1,300조원을 투자하여 야심 차게 계획하는 네옴(NEOM) 프로젝트의 덕분에

 

아스팔트로 왕복 4차선의 길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곳에는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쌓은 여호아

 

닛시 제단 터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모세가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흐르게 만들었던 므리바 반석이

 

있었다. 므리바 반석은 모세 계곡(와디 무사, Wadi Musa)을 지프로 한참을 이동하였는데, 20번 이상 이곳을 방문한

 

전문 기사 현지 안내인도 길을 몇차례 잃을 정도로 험난한 곳이었다. 므리바 반석은 18m 정도의 큰 바위가 반으로

 

갈라진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지상 90m의 높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흘러 내린 흔적이 있어서

 

신기하였다. 다음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직접 받은 시내산(라오즈산)으로 이동하였다.

 

 

시내산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고고학적 보존지역으로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철제 펜스를 높이 쳐 놓았는데,

 

다행히 이날은 지난 우기 때 이곳에 집중 호우가 와서 철망이 무너져 내려서 아무런 저지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시내산은 가파르고 험난하여 당일에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은 매우 힘들다. 모세는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이 험한 산을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리라. 시내산 입구에는 모세가 산을 올라 간 후

 

소식이 없자 모세의 형 아론은 백성들이 안달하고 조바심 내는 것을 달래기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애굽식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 송아지 제단이 있었다. 이곳 역시 사우디 정부가 고고학적 발굴 터를 펜스로

 

막고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였다. 다행히 우리 일행 중에 전문 카메라맨 장로 한 분이 다음날 시간을 내어 이곳을

 

방문하고 허락을 받아 자세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시내산으로 올라가는 중턱에는 12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끌고 가던 통로와 열 두 돌기둥 흔적들, 화목제를

 

드린 번제 터, 피 뿌린 단으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있었다. 또한,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여 거주했던

 

호렙산 동굴이 멀리서도 뚜렸하게 보였다. 성경에는 바알 선지자 400명을 물리친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 한마디에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으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고 그가 머물렀던 동굴이 있는데 대부분 학자들은 이곳을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지역으로 보고 있다. 네게브 지역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친 갈멜산에서 걸어서

 

1주일도 안되는 거리이다. 필자는 엘리야 선지자는 네게브 지역이 아닌 모세가 머물렀던 미디안 지역의 호렙산으로

 

가지 않았나 추측하며 이 거리는 족히 40주야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이곳에는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을 심판하기 위해 징벌로 3,000명이 희생당한 무덤 터가 있었다. 또한, 애굽 소인 아피스가 그려진

 

암각화나 소를 숭배하는 그림들이 암각화로 여기 저기 널려 있었고 신기하게도 아직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2편에서 계속....>

 

 

<본 여행후기에 사용된 사진은 이번 답사에 함께 참석하신 이봉준 장로님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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